[살며 생각하며] 다산초당~백련사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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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다산초당~백련사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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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식

(주)건축사무소 광장 상무 



노르웨이 영화 ‘오슬로의 이상한 밤’은 철도 기관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였습니다. 몇 해 전, 샌타모니카 해변 인근 '모니카 필름센터'에서 상영했었죠. 오슬로와 베르겐을 오가는 열차를 몰다가 은퇴하는 기관사 얘깁니다. 하루 종일 달려 목적지에 도착하면 기관사 전용숙소 식당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하룻밤을 지낸 뒤 다시 출발역으로 되돌아 오는 단순 반복되는 일과를 그린 영화였죠. 특이한 것은 대사가 거의 없는 점이라고 할까요. 


철로 위에 쌓이는 눈송이들이 기관차 전조등 불빛에 반사되면서 눈덮힌 북유럽의 풍광이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화면에 삽입된 주제음악도 기관차가 궤도 위를 달리면서 내는 덜컹거리는 소음(낮은 볼륨으로 반복하여 들리는)뿐이었고요. 영화상영 2시간 가량 내내 무심히 몰입하게 만들더군요. 제게는 첫 번째 ‘멍 때리기’ 체험이었지요. 


소위 말하는 멍 때리기 경험을 다시 반추하게 된 이유를 들자면, 며칠 전, 서울 잠수교에서 ‘제6회 멍 때리기 대회’가 열렸다는 보도를 접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가치있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지요. 지난 주말은 ‘몸의 긴장을 풀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멍 때리기의 일환으로)’도 할 겸해서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草堂)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인근 다산박물관 앞뜰에 세워놓은 40여점의 대형 화강석이 눈길을 끕니다. 정계·재계·지자체 인사 및 시인·농부·교사·엔지니어·군인·학생 등 각계 각층의 서민들이 애송하는 다산 어록 중 한 대목씩 골라서 자신들의 이름과 함께 새겨 놓았더군요. “검소함이란 한 벌의 옷을 만들 때마다 오래 입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 "우리에게는 모두 허물이 있으니 서둘러 힘 써야 할 일은 오직 허물을 고치는 것이다”, “병을

숨기는 자는 몸을 망치고 재산을 숨기는 자는 나라를 망친다”, "세상에는 두 가지 저울이 있다. 옳고 그름의 저울, 이로움과 해로움의 저울이 있다. 금품과 뇌물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집안을 바로 잡은 것이다”, "만일 포목 몇 자, 동전 몇 잎 때문에 잠깐이라도 양심을 저버리면, 그 즉시 호연지기가 없어지는 것이다”, "성인의 도리, 제왕의 정치, 인간의 정서는 음악이 아니면 실현되지 않는다”, "독서는 사람의 일 가운데 가장 깨끗한 일이다”, "세상에서 지금 눈앞의 처지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 등 정치·문화를 어우르는 다양한 어록들이 요즘 시대에도 귀담아 들을 만하게 다가왔습니다. 


잠시 후 언덕 위, 다산초당에 당도했습니다. 일자집 형태의 조촐한 세 칸짜리 방으로 된 한옥 툇마루에 앉아서 다산 선생이 직접 만들었다는 연못도 바라봤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1762-1836)은 유배지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18년 간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활동을 했다지요. 그중 ‘목민심서’는 당시의 관직 부임(赴任)에서 해관(解官)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갖추어야 할 규범을 총12편으로 나누어 저술한 책입니다. 그중 관직에 부임하면 염두에 두어야 할 덕목을 다룬 제2편 ‘율기(律己)’중 마음가짐에 대한 일부를 옮겨봅니다. 


"청렴은 세상에서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는 장사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청렴해야 한다. 청렴하지 못한 사람은 지혜가 짧기 때문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청렴해야 한다는 표현은 얼핏 보면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작은 이익에 흔들리지 않고 청렴한 벼슬살이를 하다 큰 이익이 되는 정승, 판서의 지위에 오른다면 청렴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되니, 청렴이야말로 이익이 가장 큰 장사라는 것이 통하게 된다라는 취지라고 나와 있습니다.(다산(茶山)에게 시대를 묻다 57쪽, 박석무著 현암사刊 2021년). 


다산초당을 지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천일각 정자마루에 올라 섰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강진만을 바라봅니다. 바다 옆 육지에는 청보리밭이 파도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백련사 가는 오솔길로 접어 들었습니다. 길 옆 좌우에는 수령 100~300년 된 동백나무 군락지와 오래된 참나무, 소나무, 야생 차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가시나무들이 오월의 훈풍과 함께 그럴싸한 ‘멍 때리기’ 현장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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