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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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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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수표보다 센 것

 

#. 백지수표는 정말 존재하는가. 특별한 계층의 특별한 사람들 만이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렸을 때 신문에서 봤다. 일류 여배우, 일류 탤런트가 재벌회장으로부터 받은 백지수표에 상상도 못할 엄청난 금액을 써서 은행창구에 제시했다. 당시 경제규모로는 해결이 안되는 금액에 은행도 놀랐고 세상도 놀랐다. 법으로는 어떻게 되나?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런 경우 재벌과 은행은 한통 속이다. 


우선 지불정지를 때려 사회상식에 반 한다고 안주고 볼일이다. 주면 다 써버리니까. 무슨 댓가로 받았나 궁금했다. 돈장사를 하는 은행이 돈에 놀랄 만큼 큰 금액을 한 개인에게 지불해야 한다면 그 액수가 응당 밝혀져야 함에도 제 식구 감싸기에 아무도 모른다.


한국재벌의 도덕성 타락, 부실경영, 국민혈세 낭비 서민대중을 무시하는 한편의 영화 또는 드라마를 보는듯 했다. 여배우가 주인공으로 출연했으니 당연히 코미디는 아니다. 나쁜 일이 생기면 무조건 코미디 프레임을 씌우고 보는 것은 병폐다.


주인공은 미국으로 갔다. 왔다는 얘기도 있고 다시 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재벌은 비난받고 사회의 공적이 돼서 금방 숨을 거둘 것 같더니 지금까지 쌩쌩하고 오히려 더 잘됐다. 대중은 현명하다. 오래 볼 사람을 밀어주고 먹을 게 있는 쪽을 선호한다. 재벌과 충돌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몸으로 보여 주었다. 재벌은 영원히 영원하다.


#. 같이 만났어도 서로의 생각은 달랐다. 

배삼용 선생이 백지수표를 받게 됐다. 영등포 연흥극장에서 하루 4회 공연이면 천만원을 받는데 연흥시장 상가를 구할 수 있는 흰딱지가 돌아다니고 있을 때다. 흰딱지 10장 즉, 상가 10채를 드릴테니 하루만 공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수표나 어음이나 딱지가 하도 부도가 잘 나니까 안전하게 살려고 웬만한 건 거절했다고 한다. 성격상 늘하던 일이 아니면 무조건 안 한다나 어쨌다나 백지수표를 차버렸다.  

 

사람들이 선생님을 '연기만 바보인 줄 알았는데 생활까지 바보시네요'라며 비아냥 거렸다. '나는 바보라서 먹고 산다. 너희는 똑똑해서 밥을 굶니. 나는 딱지고 백지수표고 몰라. 그냥 웃기는 연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선생님의 철학은 분명했다. 선생님은 평생 주민등록번호를 모르고 살았다. '얼굴이 주민등록증인데 그걸 뭘 할려고 외우냐, 그냥 통째로 드리밀면 돼.'


그때 눈 딱 감고 하루 공연했으면 상가가 10개 생겨 임대료로 꽤 풍요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백지수표를 받고 연기했던 유명한 코미디언, 코미디의 황제였던 배삼용 선생님께서 돌아가실 때는 재산이 한 푼도 없었으며, 병원비가 자그마치 3억5000만원이나 밀렸다. 


코미디협회에서 정몽준 회장께 부탁을 드려 선처를 받았다. 정몽준 회장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배 선생님 코미디를 보며 웃었고, 즐겁게 살았는데 국민영웅이신, 국민을 즐겁게 해주신 분께 보답해 드려야죠" 하면서 쾌히 모든 것을 탕감하고 장례식을 잘 치를 수 있게 하였다. 백지수표도 노후를 책임지지는 못한다.


#. MBC, TBC 민간방송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절 방송문화는 크게 발전하였다. 매년 프로그램 개편 때가 되면 인기 코미디언을 잡기 위한 총력전이 펼쳐진다. 가끔 신문기사에 심야에 납치극이 있었다, 백주에 감금사태가 벌어졌다는 기사가 났다. 코미디언 쟁탈을 위한 양 방송국 간의 난투극도 벌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호텔 VIP룸으로 코미디언들은 잘 모셔 극진히 예우하고 프로그램 2~3개 보장, 출연료 인상, 전속료 인상 협상을 하는데 코미디언들이 시청률을 선도하고 전체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기 코미디언 전속 협상에 방송국이 사활을 걸고 다툰 것이다. 


추론을 하자면 다음과 같은 가설이 있을 수가 있겠다. 협상이 끝났을 때 당근용으로 빼들었던 백지수표를 다시 넣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보너스라는 이름을 붙여 드리게 되는데….


#. 비서가 귓속말로 '선생님 백지수표는 ~만 쓰세요'라며 언질을 준다. 인기 코미디언들은 이미 협상으로 얻을 것을 다 얻었고 언론에 백지수표를 받았다는 홍보까지 다 된 터에 더 바랄 것이 없다. 가이드라인을 철저히 지켰다.


코미디 분야는 방송국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방송국 간에 지나친 시청률 경쟁으로 싸움이 계속되니 문제가 생기게 된다. 객관적 사고보다는 주관적 사고로 방송제작이 이루어지니 사회적 비난을 받게 된다. 1975년 사회에 악영향을 주고 어린이 교육에 해를 끼친다고 코미디 정화를 명목으로 프로그램 철폐 명령이 내려졌다. 코미디가 백지수표를 받는 전성기가 너무 길었나 박해를 받는 시대가 왔다.


코미디는 방송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마침 구봉서 선생께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가 있어 '각하 택시가 교통사고 친다고 택시를 다 없애면 서민 대중은 어떻게 합니까'라는 고언을 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내가 없애라고 안했는데'라고 말했고, 다음날부터 코미디는 다시 복원됐다.


한 방송사에 한 개의 코미디를 해도 된다는 국가정책이 하달되었다. 구봉서 선생은 백지수표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친다. 잘못 이해하면 오해할 수 있어 불이익을 받을지 모르는데 후배들을 위해 용기있게 진언을 한 것이다. 절대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운명이 달라진 시대, 정말 코미디 같은 세상을 살았다.


#. 백지수표보다 더 쎈 게 있나? 있다. 그럴 리가? MBC '웃으면 복이 와요'를 연출한 코미디 제작의 거목 김경태 PD는 TBC로 스카웃됐다. 사단 전체의 이동이 불가피 했다. TBC 방송재벌의 백지수표가 작용했을 것이다. 배삼룡을 MBC에서 TBC로 당겼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유일하게 즐겨보시는 프로가 웃으면 복이 와요 였다. TV를 보다가 갑자기 배삼룡이 안보이네 “주인공이라 나중에 나옵니다” “끝까지 안 나오잖아” “어떻게 됐지”. 국가 최고 권력자의 한마디에 비서진들이 비상이 걸렸다. 고지식하게 사실대로 말한다고 “TBC로 갔다 합니다” 했을 때 “각하께서” “그럼 나도 TBC로 따라가야 돼” “계약이 끝나면 손 놓고 나간답니다” “그래 정권이 끝나면 나도 손놓고 나가야 돼” 이런 사태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각하께서 급히 찾는다는 통보를 받은 배삼룡 선생은 백지수표고 부도수표고 분실수표고 위조수표고 다 내던지고 당장 TBC를 떠나 MBC에 복귀했고 웃으면 복이와요에 나타났다. 그러니깐 두루 삼룡이가 갔다왔다나 우쨌다나! 


#. 믿거나 말거나 있거나 없거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매년 백지수표를 받았던 서영춘 선생은 공부해서 남주나 출세해서 남주나 열받아서 남주나의 유행어를 남겼다. 정작 백지수표를 받아서는 남줬다. 달린 식구가 많았다. 형제도 많았다. 주변에 도와 줄 사람도 많았다. 인정이 많아서 씀씀이가 많았다. 생활은 검소했다. “방송에서 출세 할려면 방송밥을 많이 먹어야 해 놀아도 방송국에서 놀고 쉬어도 방송국에서 쉬어야 일이 걸려. 방송국에 몸을 담그고 뼈를 묻는 정신으로 방송을 해야 돼." 


그러면서 술은 늘 값싼 소주다. 안주는 식당에서 그냥 얻는 소금이다. 백지수표를 받는 스타가 식탁이 너무나 부실했다. 58세 단명하셨다. 문병을 갔을 때 내일 돌아가실 분이 몸이 나으면 꼭 방송에 나가 해보겠다며 어제 TV에서 후배들이 했던 것을 메모해 업그레이드시킨 원고를 놓고 연습을 했다.


남을 많이 웃겼지만 본인이 더 많이 웃어 준 분이다. 백지수표도 관리를 못하면 건강에 도움을 못 준다.

구봉서 선생의 사모님께서는 백지수표 받아 올 때마다 연예인 인기 떨어지면 큰일인데 어떻게 하나 걱정 끝에 버는 것마다 저축을 하여 건물을 짓고 임대했다 한다. 건물은 통째로 업자에게 맡기는 게 아니고 기초, 철근, 콘크리트 분야별로 도급을 주어 직접 지휘하며 완성했다. 운 좋게 공사비의 몇 배씩 주고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건물 지을 때마다 대박이 났다. 백지수표도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빛을 보게 된다고나 할까 사모님의 승리다.


#. 백지수표가 건강을 지켰나, 명예를 지켰나, 서영춘 배삼룡 구봉서 송해 임희춘 선생은 정말 웃겼다. 백지수표는 전설에 묻고 백지로 마음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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