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호랑이가 달아나고 토끼들이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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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호랑이가 달아나고 토끼들이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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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호랑이해가 물러가고 토끼해가 다가왔다. 호랑이와 토끼는 그 대비가 지나치게 선명하다. 산중왕 호랑이는 홀로 숲속을 떠돌며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는 약탈자, 풀만 뜯는 토끼는 연약하고 평화로운 동물이다. 도무지 호랑이의 맞수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가족끼리 무리생활을 하지만, 호랑이를 만나면 긴 뒷발로 껑충껑충 뛰며 도망치기에 바쁘다. 아무런 공격무기가 없기 때문이다. 곰의 사나운 발톱도,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도 없다. 공격무기는커녕 어떤 방어수단도 지니고 있지 않다. 코브라처럼 독침을 내뿜지도 못하고, 카멜레온처럼 변신의 재주도 부릴 줄 모른다. 


19세기 초반, 유럽은 나폴레옹의 독무대였다. 그는 대륙의 호랑이였다. 나폴레옹의 힘이 미치지 않는 나라는 바다 건너 영국뿐이었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각국과 영국의 무역을 금지하고, 영국과 그 식민지의 제품을 몰수했다. 대륙봉쇄체제는 영국뿐 아니라 대륙의 여러 나라에도 큰 고통을 안겼다. 특히 목재와 곡물을 영국에 수출하던 러시아의 경제적 손실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드디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대륙체제의 탈퇴를 선언하고, 영국과 통상을 재개한다. 숨죽이고 있던 프로이센과 스페인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호랑이 같은 나폴레옹이 토끼 같은 저들의 저항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프로이센‧폴란드의 연합군 60여만 명으로 대육군(Grande Armée)을 결성하고 러시아로 진격한다. 연합군이 지닌 보급물자는 3주 분량뿐이었다. 3주 안에 러시아를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러시아군 총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는 토끼처럼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는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거치면서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눈 밖에 났지만, 딱히 그를 대신할 만한 지휘관도 없었다. 나폴레옹의 대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해오자 ‘시간과 인내’를 두 전사(戰士)로 삼은 쿠투조프는 모스크바를 버리고 서쪽으로 퇴각했다. 텅 빈 모스크바에 무혈 입성한 나폴레옹 군대는 굶주림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과 맞붙어 싸우자는 참모들의 건의를 줄곧 깔아뭉갠 쿠투조프도 겁쟁이라는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러시아 황실은 후퇴만 고집하는 그를 ‘무능하고 게으른 늙은이’라고 깎아내렸다. 


쿠투조프는 후퇴를 거듭하면서 나폴레옹 군대가 현지에서 물자를 조달할 수 없도록 도시들을 파괴하고, 건물마다 창고마다 불을 지르는 청야(淸野)전술로 나폴레옹을 괴롭혔다. 여름에 시작해서 가을을 지나고 겨울이 되도록 쿠투조프를 쫓아 러시아 내륙까지 깊숙이 쳐들어간 나폴레옹의 60만 대군은 동토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연합군의 철수를 명령한다. 쿠투조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한 추격전을 벌여 토끼처럼 달아나는 나폴레옹 군대를 궤멸시켰다. 60여만 명의 연합군 중 생존자는 3만여 명에 불과했다. 대육군의 대몰락이었다. 


쿠투조프는 ‘러시아 조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되면서 공작 칭호를 받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잔대성당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나폴레옹을 몹시 경멸했던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쿠투조프를 ‘전쟁의 참된 본성에 대해 분명한 비전을 가진, 온순하고 영적인 사람’이라고 극찬했고, 작곡가 차이콥스키는 <1812년 서곡>으로 쿠투조프의 승리를 찬양했다. 


호랑이 같은 나폴레옹 앞에서 토끼처럼 달아났던 쿠투조프의 나라 러시아가 지금은 핵무기를 보유한 호랑이 강대국이 되어, 지난해 슬라브 동족의 나라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그 우크라이나가 토끼해인 올해에는 쿠투조프의 두 전사 ‘시간과 인내’를 무기로 삼아 러시아군을 격퇴하고 자유와 평화를 되찾기 바란다. 그리고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덮치려는 싸움판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도 이제는 토끼들 무리처럼 평화의 모듬살이를 회복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달리기 경주에서 가끔은 느림보 거북이에게도 져주는 토끼처럼 말이다. 거북이를 깔보며 낮잠을 즐기다가 쓴맛을 다시는 어이없는 패배만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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