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영의 마음산책] 한국이 보여준 민주적 회복성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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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영의 마음산책] 한국이 보여준 민주적 회복성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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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영

연세대 교수 

한국상담진흥협회 이사장


필자는 30여년 동안 가족상담 전문가로 살아왔다. 어린시절 부모의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찾아오는 내담자들이 많다. 그들에게서 이런 고백을 자주 들었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저는 제 심장박동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공포에 휩싸였어요.”


이미 수 십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군인들의 군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는 광주 시민들이 있다. 그들도 지난 3일 밤 극심한 공포에 떨어야 했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도 작년 영화가를 뜨겁게 달구었던 영화, '서울의 봄' 2탄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소름 끼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내 아내는 12월 한밤 중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방송을 접하자마자 갑자기 가슴을 쥐어뜯었다. 아내는 광주 출신도, 어린시절 학대 경험도 없는 여성인데, 2024년 12월 현재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생활 중인 막내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당연히 아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내는 당장이라도 철원으로 갈 기세였다.


그러다가 돌연 국회로 가자고 졸랐다. 계엄 해제를 위해 모여드는 국회위원들을 우리라도 지켜야 한다면서. 그런 아내의 모습은 생전 처음이었다. 아내를 겨우 진정시키고 TV와 SNS 생방송을 통해 긴박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


생방송을 통해 아들 또래의 군인들과 대치하는 엄마, 아빠들이 보였다. 한 아버지는 “너희들 절대로 역사의 죄인이 되어선 안 된다”면서 매달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 야밤에 여의도 국회 앞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절대 대통령이 척결대상으로 지목한 ‘종북좌파’들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어린 자녀까지 동반하고 그 자리에 있는 젊은 부모들도 보였다. 아마도 그들은 대한민국 헌법 제77조에 명시된 ‘비상계엄이 선포된 때에는… 집회, 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한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는 조문을 자세히 몰랐을 것이다. 계엄 선포 중에도 헌법에는 정부와 법원의 권한 제한만 있고, 국회 통제의 근거조항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상태로 그 자리로 모인 게 결코 아니었다. 


누군가에겐 ‘종북 좌파’로 보일 시위대들이 내 눈에는 달리 보였다. 피눈물로 지켜낸 국가의 민주주의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국가 폭력으로 얼룩진 과거 역사를 다시는 자녀세대에게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그 한 가지 목표의식을 가진 부모들, 지극히 평범한 시민들이 맨몸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외신들은 한결같이 한국의 민주주의 ‘성공 신화’가 한 밤의 비상계엄 사태로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고 보도했다. 전혀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는 백악관 국가안보실 대변인의 언급이 보도되면서 한미동맹에도 큰 위기가 닥쳤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연이어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윤 대통령의 계엄선포는 “심각한 오판”이라고 지적했다. 동맹국 정상의 결정에 대해 이런 표현을 쓴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하지만 맨몸으로 군인들과 맞서는 시민들의 모습이 생방송으로 전달되고, 계엄해제가 만장일치로 의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민주주의의 쾌거’라는 외신의 긍정 평가가 이어졌다. 미국 블링컨 국무장관은 “한국의 민주적 회복성과 법치주의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사례”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레바논 태생 시인 칼릴 지브란은 부모에 대한 글을 남긴 적이 있다. “그대들이 아이들처럼 되기에 힘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은 그대들처럼 만들지 말라… 그대들은 활, 아이들은 화살이다. 사수인 신(神)은 그대들을 힘껏 당겨 아이들을 먼 미래로 쏘아 보내신다.” 


중무장한 채 국회로 침투한 최정예 공수부대원도 우리들의 자녀들이었다. 퇴각명령 후 철수하는 공수부대 장병이 7~8번을 고개를 90도로 숨기며 시민들에게 죄송하다고 인사하는 장면을 보고, 내 아내는 목놓아 오열했다. 아마도 아무런 죄 없이 고개를 숙이는 군인의 모습에서 아들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기 때문이리라.


나는 온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12월 3일 밤 권위적인 '꼰대세대'로 불리는 부모들의 뜨거운 회복탄력성을 목격했다. 군화발에 밟혀서 허리가 끊기었어도, 다시 일어나 화살 같은 자녀를 가장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미래로 쏘아 보내려는 활의 의지, 그것이 바로 전 세계에 대한민국 부모들이 보여준 민주적 회복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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