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의 기독교 인문학] 기도와 데모 사이
한 초등학생이 자전거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전거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큰 소리로 자전거를 달라고 기도했다. 아이의 기도가 시끄럽다고 생각했던 할머니가 “얘야 하나님께서는 조용히 기도해도 다 들으신단다.”라며 타일렀다. 할머니 말씀을 듣던 아이는 “쉿! 할머니 이 기도는 하나님이 듣기 전에 아버지가 들어야 한단 말이에요!”라고 말했다. 이 꼬마의 기도는 기도일까? 데모일까?
기도가 하나님의 귀를 향하지 않고 사람의 귓가를 겨냥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다. 이 잘못된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 즉 잘못된 신관으로 말미암는다. 건강한 기도관(祈禱觀)은 건강한 신관(神觀)에서 온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바르게 기도한다. 하나님을 알수록 기도가 성숙해진다.
필자의 기도 신학은 성경, 신학교 강의, 그리고 신학 서적 독서로 뼈대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 뼈대를 견고히 붙잡아 주는 콘크리트 역할은 기도체험이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기도 생활과 응답의 체험 그리고 필자의 기도 실천과 응답 경험이 기도 신학 혹은 기도관을 만들었다. 사실 기도 생활을 실제적으로 이끄는 것은 기도와 응답으로 하나님의 체험이다.
기도의 종교학적 개념은 ‘신을 설득하는 인간의 종교 행위’다. 어떻게 신을 설득하느냐는 그 종교 혹은 종교인의 신관(神觀)에 달려있다. 신관(神觀)이 천박하면 기도도 천박해진다. 하등종교나 무속신앙은 자신의 신을 위협하거나 신을 꼬드긴다. 자기 삶의 윤리는 고려하지 않고 신의 비위만 맞추면 신은 설득 당한다고 믿는다. 이런 기도는 신을 조종하려는 천박한 기도다.
성경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기도를 가르친다. 성경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성숙으로 변화시킨다. 성도가 바른 기도를 하려면 하나님 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기도회 시간에 굳이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는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성숙한 기도는 하나님 뜻대로 드리는 기도다. 하나님 뜻대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 떼쓰거나 억지를 쓰는 것도 아니다. 저주와 분노를 쏟아 붓는 것도 아니다. 성숙한 기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하나님 뜻대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성숙한 솔로몬의 기도에 감동하셨다. 솔로몬은 욕망과 탐욕이 아닌 지혜를 구했다.
남가주 지역 <나라를 위한 특별 기도회>를 마치고 항의를 받았다. 흥미롭게도 몇 분은 기도회가 너무 보수적이었다고 항의했고, 또 몇 분은 기도회가 너무 진보적이라고 항의했다. 그들은 진영 별로 거리 집회에서 사용되는 격한 용어가 기도회에서도 나오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필자는 그들에게 “우리는 사람들에게 데모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라고 똑같이 대답했다.
“기도냐? 데모냐?”는 ‘누가 들어 주기를 바라는가?’에 달려있다. 사람이 들어주기를 바라면 데모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길 바라면 기도다. 요즘 진영마다 “시국 거리 기도회”를 갖는다. 그들이 하나님보다 아버지가 듣기를 바랐던 꼬마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바란다. 만약 사람들을 향해 외친다면 차라리 어느 역사 선생처럼 외치는 것이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