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감성 사이] 스미소니언에 걸린 인왕산과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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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감성 사이] 스미소니언에 걸린 인왕산과 서울

웹마스터

김미향

오클렘그룹 대표


스미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에서 한국 특별전이 열리고 있으며, 그 안에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전시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 나는 다시 그 그림을 찾아보게 되었다. 작품 속 인왕산은 웅장하면서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비가 갠 뒤의 산세, 바위의 윤곽, 안개가 걸린 능선의 모습이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풍경처럼 느껴졌다. 세계적인 박물관에 걸린 작품이라는 사실보다도, 그 안에 담긴 인왕산이 여전히 내 어린시절 소중한 기억 속의 친근한 산으로 보인다는 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나는 한동안 그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현재 스미소니언에서 진행 중인 이번 한국 전시는 조선왕실 회화와 산수화, 도자와 책가도 등 전통 미술에서부터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으로 이어지는 근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의 흐름을 시대 순으로 보여주는 전시다. 개인의 수집으로 남아있던 문화유산이 어떻게 국가의 자산이 되고, 다시 세계인의 문화로 공유되는지를 조명하며, 한국 미술이 이제 세계 공공 박물관의 정식 역사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시의 중심에 놓인 〈인왕제색도〉는 조선후기 실경산수의 대표작이다. 중국식 이상 산수가 아닌, 실제 한양의 풍경을 그대로 담아낸 그림이다. 비에 젖은 바위의 질감, 산허리를 감싸는 안개, 굽이치는 능선에는 자연을 관념이 아니라 ‘삶의 터전’으로 바라보던 조선인의 세계관이 스며있다. 스미소니언 전시장 한가운데에 놓인 이 인왕산은 이제 한 도시의 풍경을 넘어, 한국문화의 정신을 전하는 상징이 되고 있다.


나에게 인왕산은 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산이었다. 어린시절 인왕산은 나의 놀이터였다. 바위 사이를 뛰어다니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놀던 곳이었고, 아버지를 따라 강아지와 함께 산길을 오르내리며 약수터를 찾던 날들도 많았다. 활터가 있던 길을 지나 숨이 찰 때까지 오르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닿곤 했다. 그렇게 인왕산 꼭대기에 올라 내려다본 서울 전경은 어린 내 눈에는 세상 전부처럼 넓으면서도 동시에 모두 ‘앞마당’처럼 느껴졌다. 청와대에서 남산타워, 멀리 롯데호텔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서울은 거대한 도시라기보다, 내가 다 알고 있는 동네처럼 친근했다. 사대문 안 서울 전체가 하나의 생활권처럼 가깝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치마바위는 늘 그 풍경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나는 그 바위에 직접 올라간 적은 없지만, 인왕산을 오를 때마다 언제나 올려다보게 되는 존재였다. 넓은 이마처럼 훤히 드러난 그 바위를 가리키며 아버지는 사극에서 나올 법한 절절한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도성을 지켜온 산의 기운, 비 갠 뒤 인왕산이 품은 위엄, 그리고 겸재 정선이 왜 하필 그 순간의 인왕산을 그렸는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인왕산이 단순한 뒷동산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의 뿌리이자 역사가 쌓인 공간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워갔다.


세월이 흐른 지금, 인왕산 아래 서촌 일대는 또 다른 얼굴로 정돈되어 있다.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공간이 생기고, 오래된 한옥들이 보존되며, 무너지기보다 ‘지켜내는 정비’의 방식으로 골목과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를 밀어내며 새로 짓는 개발이 아니라, 시간을 품은 채 현재로 이어가려는 모습 속에서 나는 여전히 인왕산이 서울의 한복판에서 숨 쉬고 있음을 느낀다. 그 인왕산이 이제 스미소니언이라는 세계의 무대에 섰다. 내가 앞마당처럼 내려다보던 그 산과 그 서울이, 이제는 세계인 앞에서 한국의 자연과 도시, 그리고 정신을 상징하는 풍경이 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김환기의 점화도 함께 소개되고 있다. 김환기가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 가지를 생각하며 찍어간 점들”이라 말한 그의 작품 속에는 도시의 기억과 시간, 산과 하늘의 기운이 무수한 점으로 응축돼 있다. 나는 그 점의 세계 속에서도 인왕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던 그 앞마당 같은 서울의 풍경을 겹쳐 보게 된다. 실경으로 남은 인왕산과, 추상으로 번역된 서울은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기억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12월, 한 해의 끝자락에 접어든 지금. 스미소니언에 걸린 인왕산과 서울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인왕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던 그 풍경을 생각한다. 하얀 눈에 덮여 품위 있고 고요해진 겨울 인왕산처럼, 우리 사회도 불필요한 소음과 혼탁을 씻고 차분한 마음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린시절 나에게 늘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던 그 산처럼, 이 나라 또한 다음 세대를 묵묵히 품어주는 터전으로 오래 남기를 소망한다. 이 연말, 스미소니언에 걸린 인왕산과 그 안에 담긴 조국의 모습이 조용히 자랑스럽고,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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